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고려의 왜구에 대한 명나라 [[홍무제]]의 반응 === 이때 명나라로 갔던 사신 성준득(成准得)은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이 전하는 말을 가지고 고려에 돌아왔다. 이 서한은 공민왕이 [[불교]]에 빠져 있다고 디스하는 서한인데, 개중에 왜구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왜구에 대해 다루는 부분만 옮겨보자면 이러하다. >"근자에 귀국한 우리 사신에게 고려 국왕이 어떻게 정치를 행하는가 물었더니, 왕은 불교에만 힘을 기울이며 해안으로부터 50리 혹은 30리 ~ 40리 떨어진 지역이라야 백성들이 그나마 안정되게 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짐이 까닭을 묻자 왜놈들이 소란을 피우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성곽의 상황을 물었더니 백성은 있어도 성은 없다고 말했다. 또한 군대의 방비 태세를 질문하자 군기가 제대로 서 있지 않더라는 대답을 들었으며, 궁궐이 어떠하더냐고 질문했더니 궁궐은 있어도 정무를 보는 장소가 없더라고 말했다. 정말 상황이 그러하다면 짐이 국왕을 위해 심각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현재 오랑캐 원나라의 국운은 이미 끝났으나 변방사막의 백성들은 아직 한꺼번에 통치할 수가 없는 형편이며 짐의 군대가 아직 요동과 심양 지역으로 출동하지 않았기에 그 틈을 타 광포한 자들이 가끔 나타날 것이 예상된다. 그놈들이 중국의 근심거리는 되지 않겠지만 고려를 소란하게 만들까 우려된다. 하물며 왜놈들이 십년 넘게 바닷섬을 휘젓고 다녀 고려 왕국의 모든 사정을 세세히 알고 있으리니 이것 또한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국왕이 그들을 물리치려 할 경우, 깊은 해자와 높은 보루 및 충분한 비축 물자가 없으면 사방에서 원병이 오더라도 적들의 예봉(銳鋒)을 꺾고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 >'''《고려사》 공민왕 19년''' ||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w_1024_127803139919441.jpg|width=130]][br]'''[[홍무제]](洪武帝)''' || 명나라도 왜구 문제에 이후 골머리를 앓긴 하지만, [[명사(역사책)|명사]](明史) 일본전(日本傳)을 보면 왜구가 본격적으로 명나라를 괴롭히기 시작한것은 1369년이고, 명사 태조 본기에서도 1369년에 왜구가 [[산동]]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주원장이 왜구 문제로 고려에 대해 걱정하는 뜻을 보였을 당시에는 명나라에서는 왜구가 아직까지는 아주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하간 고려를 침공하는 왜구는 명나라에서까지 유명세를 떨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